[김재동 원로목사의 신앙칼럼] 가말리엘의 교훈

사도행전 5장 33절 이하에 보면 이스라엘의 교법사(율법교사) 가말리엘이 등장합니다. 가말리엘은 이스라엘의 7대 랍비 가운데 한 사람으로서 그의 조부는 힐렐이었는데, 힐렐은 힐렐 학파의 원조였습니다. 힐렐 학파는 그 당시 샴마이 학파와 함께 이스라엘 교법사들의 양대 산맥을 이룰 만큼 유명한 학파였습니다. 바로 이 힐렐의 손자가 가말리엘이었는데, 가말리엘은 사도 바울의 스승이었습니다. 바울은 율법을 무시하고 어겼다는 오해를 받고 악의에 찬 군중들에게 생명의 위협을 당하고 있을 때 천부장의 허락을 받아 자신을 변호하는 중에 “나는 가말리엘의 문하(門下)에서 우리 조상들의 율법의 엄한 교훈을 받았다”고 말합니다(사도행전 22:3). 가말리엘은 모든 백성의 존경을 받는 자였습니다. 그래서 아마 사도 바울도 자신의 유대인 정체성에 대하여 의심하는 자들에게 자신이 바로 그 가말리엘 교법사의 문하생이었음을 언급하지 않았을까 짐작해봅니다.

오늘은 이 가말리엘 교법사가 보여주었던 모범적인 태도에 대하여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초대교회 시절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하며 전도를 하자 이를 못마땅하게 여긴 공회원들이 그들을 잡아 공회(公會) 앞에 세우고 심문을 합니다. 그 당시 산헤드린이라고 하는 이스라엘의 공회는 의장인 대제사장 한 명을 포함해 71명으로 구성되는 최고의 권부(權府)로서 입법권, 사법권, 행정권을 모두 장악하고 있었으며, 특히 재판권을 도맡아 행사하는 기관이었습니다. 공회원들은 제자들에게 예수의 이름으로 사람들을 가르치는 것을 엄금했는데 왜 너희 교(敎)를 온 예루살렘에 퍼뜨리느냐고 심문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서슬이 퍼런 공회원들 앞에서 조금도 위축되지 않고 담대하게 맞섭니다.
(사도행전 5:29-32) “사람들보다 하나님을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니라. 너희가 나무에 달아 죽인 예수를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살리시고 이스라엘로 회개케 하사 죄사함을 얻게 하시려고 그를 오른 손으로 높이사 임금과 구주를 삼으셨느리라. 우리는 이 일에 증인이요 하나님이 자기를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주신 성령도 그러하니라.”

이 말을 듣자 공회원들이 대로(大怒)하며 사도들을 죽이려고 합니다. 바로 이때 가말리엘이 가로막고 나섭니다. 공회원들의 위신을 배려해서 일단 사도들을 잠깐 밖으로 내보낸 후에 공회원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아, 너희가 이 사람들에게 어떻게 하려는지 조심하라. 이전에 드다가 일어나 스스로를 선전하매 약 사백 명이나 따르더니 그가 죽임을 당하매 따르던 모든 사람들이 흩어져 없어졌고, 그 후에 호적할 때에 갈릴리의 유다가 일어나 백성을 꾀어 따르게 하다가 그도 망한즉 따르던 모든 사람들이 흩어졌느니라. 이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사람들을 상관하지 말고 버려두라. 이 사상과 이 소행이 사람으로부터 났으면 무너질 것이요, 만일 하나님께로부터 났으면 너희가 그들을 무너뜨릴 수 없겠고 도리어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가 될까 하노라.”
가말리엘의 신앙적이면서도 설득력이 있는 논리에 공회원들도 머리를 끄덕였습니다. 그래서 사도들을 다시 불러들여 채찍질하며 다시는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 못하도록 하고 놓아주었습니다. 그냥 놓아주자니 좀 자존심이 상했던 모양입니다.

우리는 가말리엘에게서 배워야 할 귀한 교훈이 있습니다. 이성보다 감정을 앞세우다보면 자칫 일을 그르칠 수 있으니 신중할 필요가 있다는 교훈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간에게 희로애락(喜怒哀樂)의 감정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감정에만 치우치다 보면 자칫 과오를 범할 수 있으며, 특히 이 중에서도 분노의 감정은 지혜롭게 조절할 필요가 있습니다. 분노조절(anger management)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가족상담이론 중에 ‘자기분화’(自己分化, Differentiation of Self)라는 이론이 있습니다. 미국 테네시주의 정신과 의사인 머레이 보웬(Murray Bowen, 1913-1990)이 주창한 이론으로서 모든 분야에 적용될 수 있지만 특히 가족상담에 유용하게 적용될 수 있는 이론입니다. 이 이론은 여러 측면에서 고려해야 할 점들이 많기 때문에 단순하게 정리하기는 쉽지 않지만, 오늘의 주제와 관련해서 적용할 수 있는 것은 이성(Thinking)과 감정(Feeling)을 분리해야 성숙한 자아를 형성해나갈 수 있다는 주장입니다. 자신의 내면으로부터 이성과 감정이 적절하게 분리되지 않고 융합(fusion)되어버리면 자칫 감정에 휘둘릴 위험성이 농후해지며, 따라서 대인관계나 어떤 구체적인 사건을 처리할 때 역기능적인 면이 드러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지적 체계와 정서적 체계의 기능이 분리되어야만 감정과 사고 기능의 분화(分化)가 가능하며, 그럴 때 어떤 대상에 대하여 객관적이고 현실적인 사고와 판단이 가능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지 않고 이성과 감정이 서로 뒤엉켜 있으면, 즉 이 둘 사이에 분화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이성적으로 차분하게 한 올 한 올 풀어나갈 수 있는 문제도 난마(亂麻)처럼 마구 뒤엉켜서 복잡하게 돌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솔직히 우리 인간은 이성보다는 감정이 앞서게 마련입니다. 그래서 “법 보다는 주먹이 가깝다”는 말도 생겨나지 않았나 싶습니다. 미국 스포츠 중계를 보다보면, 감독이 심판의 판정에 불만을 품고 거세게 어필할 때 서로 코가 맞닿을 정도로 가까이 다가가며 고성을 지르면서도 양손은 깍지를 끼듯 몸 뒤쪽에 단단히 묶어두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법보다 주먹이 가깝게 될 경우 여러 가지 복잡한 문제가 야기된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미국인들은 화를 낸다는 의미의 angry 또는 upset과 거의 동의어로 emotional이라는 단어를 자주 사용합니다. 감정이 앞서면 화를 내기 십상이기 때문입니다. 듣기에 좀 거북살스러운 “홧김에 서방질”이라는 말도 울분을 참지 못해 차마 못할 짓을 저지른다는 말인데, 사정은 이해가 되나 이런 경우에도 조금만 감정을 억제하고 이성적으로 그 후에 따를 후유증들을 냉철하게 생각해본다면 아마도 처신이 다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성과 감정의 뒤엉킴 즉 융합현상(confusion)이 가장 두드러지는 현상이 바로 ‘내로남불’입니다. 정치계나 정치인들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현상이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 현상입니다. 남이 할 때는 비난하던 행위를 자신이 할 때는 합리화하는 태도를 이르는, 마치 사자성어 같은 이 말은 한국어만이 표현할 수 있는 매우 함축적인 말입니다. 꼭 같은 상황에서 남에게는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면서도 자신에게는 관대하게 대하려는 이런 이중잣대(double standard)의 예는 멀리 갈 것도 없이 바로 우리 자신에게서도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을 객관화할 수 있는 균형적인 시선을 가질 때 성숙한 자라는 평가를 들을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감정에 휘둘리지 않고 냉정하게 이성적으로 사고하고 판단할 때 진정으로 성숙한 인격을 갖출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팔이 안으로 굽는다고 하지만 이 또한 성숙한 태도는 아닙니다.

제 식구 감싸기도 역시 성숙한 태도는 아닙니다. 비록 어쩔 수 없이 팔이 안으로 굽고 제 식구를 감싸야 할 상황이 되더라도 판단만큼은 이성적으로 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런 태도를 가질 때 교회와 가정 안의 많은 문제도 원만하게 해결될 수 있을 것입니다. 온 국민에게 존경받았던 교법사 가말리엘이 우리에게 보여준 교훈이 바로 이것입니다.

<서울장로회 원로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