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동 원로목사의 신앙칼럼] 산 소망(a living hope)

<9월 셋째 주일 말씀>
강영우 박사님은 우리 나라에서 시각장애인으로는 최초로 박사학위를 받은 분이며, 부시 대통령 시절 최초로 미국 백악관 차관보를 역임한 분입니다. 강 박사님은 수년 전에 췌장암으로 하나님의 나라로 가셨는데, 돌아가신 후 『내 눈에는 희망만 보였다』라는 제목의 유고작이 발간되었습니다. 이 책은 그 분이 암으로 시한부 인생의 선고를 받은 후에 저술한 책입니다. 이 책에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나는 갑자기 두 눈이 안 보이게 된 상황에서 부모님과 누나를 하늘나라로 떠나보내고 장애에 대한 편견을 고스란히 피부로 느낀 채 멸시와 천대를 받으며 살아야 했다… 이후 나는 미국으로 넘어와 자식들을 낳아 훌륭히 키우고 여러 명성과 업적을 쌓으면서 남부럽지 않은 축복된 삶을 누렸다. 그런데 이제와 암이라니! 주변 사람들은 삶이 너무 불공평한 게 아니냐고 말한다.”

여기까지만 읽으면, 그리고 그저 대충 읽으면, 그가 마치 췌장암에 걸린 것을 원망을 하고 있는 듯이 보입니다. 그러나 그는 원망하기는커녕 오히려 그의 장애와 질병을 축복으로 여기며 감사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제와 암이라니!” 이 말은 강 박사님 자신의 말이 아니라 주변 사람들이 하는 말을 그대로 옮겨놓은 것입니다. 그의 고백은 이렇게 이어집니다.
“나는 시각장애인으로 살아온 지난 50여 년과 암으로 죽음을 눈앞에 둔 현재의 이 모든 것이 축복이라고 말하며 행복하다고 고백했었다. 이러한 나의 고백에 사람들은 적잖이 놀란 듯했다.”
그는 자신의 질병과 죽음을 의도하지 않게 우연히 찾아온 기회로 여기면서 이 기회를 보다 많은 사람들의 생각을 바꾸는 계기로 삼고 싶다고 하면서 이 책의 집필 동기를 밝히고 있습니다. 그의 육신의 눈은 아무 것도 볼 수 없었지만, 마음의 눈에는 ‘오직 희망’만 보였습니다.

인간은 희망을 먹고 사는 존재입니다. 독일의 사회심리학자인 프롬(Erich Fromm)은 『희망의
혁명』이라는 책에서 인간을 새롭게 정의하여 ‘Homo Esperans’, 즉 ‘희망하는 존재’ 즉 ‘희망을 먹고 사는 존재’라는 새로운 이름을 붙여주었습니다. 러시아의 대문호인 도스토예프스키는 “우리는 희망 없이는 살 수 없다. 희망 없이 산다는 것은 삶을 중단하겠다는 것과 같다.” 고 말했습니다. 덴마크의 철학자요 신학자인 키에르케고르는 ‘절망은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인간은 희망 없이는 살 수 없습니다. 희망이 오늘 우리의 삶을 지탱해 주는 원동력이 되기 때문입니다. 심리학자들이 이런 실험을 했습니다. 쥐를 잡아서 독 안에 넣은 다음 빛이 전혀 들어갈 수 없도록 밀폐를 했습니다. 그리고 그 안에 쥐를 넣었더니 3시간 이내에 모두 죽어버렸습니다. 그런데 똑 같은 독에 쥐를 넣고 빛이 아주 조금만 들어가도록 했더니 쥐들이 무려 12배 즉 36시간이나 생존했다는 것입니다. 똑같은 조건인데도 희망이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이렇게 엄청난 차이가 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희망이라고 다 같은 희망이 아닙니다. 희망 중에는 그것을 뒷받침해 줄 아무런 근거도 없는, 단순히 희망사항(wishful thinking)에 지나지 않는 희망도 있습니다. 단지 그렇게 되었으면 하고 막연하게 바랄 뿐 전혀 아무런 근거도 보장도 없는 희망을 말합니다. 또 최근들어 ‘희망고문’이라는 말도 부쩍 자주 사용되고 있습니다. ‘희망’과 ‘고문’은 궁합이 잘 맞지 않는 단어들인데 어떻게 이런 말이 만들어졌을까 한번쯤 생각해볼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사실 이 말은 이미 오래 전에 Urban Dictionary에 등재되어 있는 단어인데, 그 의미는 ‘torture of holding on to the small hope remaining’ 즉 ‘거의 가망이 없는 것에 매달리는 (심적인) 고통’ 정도로 새길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가령, 정부가 현실과는 다르게 국민들에게 희망을 준답시고 짐짓 거짓으로 장밋빛 경제지표를 제시한다면, 이것은 그것을 철석같이 믿고 희망을 가지는 순진한 국민들에게는 일종의 심리적인 고문이 되는 것입니다. 흔히 정치인들이 정권 유지를 위해 자주 사용하는 희망고문은 국민들에게 ‘거짓 희망’(false hope)을 믿도록 조작(造作, manipulation)하는 행위로서 그 결과는 허탈과 실망과 배신감이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가진 희망(소망)은 단순한 희망사항이 아니며 희망고문은 더더욱 아닙니다. 희망은 믿음, 사랑과 함께 기독교의 3대 덕목입니다. 그런데 만일 희망이 한갓 거짓된 허황한 희망이라면 기독교는 그 뿌리부터 흔들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가 가진 희망은 흔들릴 수 없는 견고한 터 위에 세워져 있기 때문에 생명이 있는 ‘산 소망’이라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베드로전서 1:3) “찬송하리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이 그의 많으신 긍휼을 따라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a living hope)이 있게 하시며”
예수님이 죽음의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셨기에 우리는 그 분의 공로 의지하여 거듭남(중생)으로써 죽음의 권세에서 벗어나 영원한 새 생명을 얻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날 위하여 내 모든 죄 담당하시고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음을 믿습니다. 그리고 나를 의롭다 하시기 위해 부활하셨음을 믿습니다. 바로 이 믿음으로 우리는 거듭나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우리의 산 소망의 근거가 됩니다.

우리는 산 소망을 가진 자이기에 환난 가운데서도 기뻐하며 인내할 수 있습니다.
(로마서 5:3-6)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을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이 말씀은 우리의 산 소망의 확실한 근거가 하나님의 사랑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독생자를 십자가에서 우리 대신 희생시키신 데에서 가장 확실하게 나타났습니다.
(로마서 5: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 그리고 그 사랑으로 말미암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인 죽음과 생명의 부활이 우리의 소망의 근거가 되기 때문에 우리는 막연한 ‘희망사항’이나 허황한 ‘거짓희망’으로 인해 당할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산 소망의 신앙으로 무장하여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고”(베드로전서 3:15) 있어야 합니다. “왜 당신은 희망을 품고 사는가? 도대체 그 희망의 근거가 무엇인가?”라고 질문 받을 때 주춤거리지 말고 당당하게 그 희망의 근거를 제시할 수 있어야 합니다.
(고린도 전서 15:19)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다만 이 세상의 삶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가장 불쌍한 자이리라.”(If only for this life we have hope in Christ, we are to be pitied more that all men.)

<서울장로교회 원로목사>